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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ara (211.♡.197.122) 작성일 조회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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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부산고구려$ #역사 #선덕여왕 #사천왕사지 #김유신묘 #법륜스님과행복시민 #가을 #도시락 #즉문즉설아침일찍 도시락을 준비한다.묵은 김치를 씻고 마늘쫑 짱아찌를 넣고 닭가슴살 소시지도 두개 칼집을 내고 굽는다.그런데 사진이 없네요 ㅋㅋ전국에서 모인 행복시민들은 서울에서는 새벽 4시에 출발했다고 한다 울산은 가까워서 8시에 북구청에 모여 부산에서 오는 버스에 합류했다.반겨주는 부산행복시민들 감사합니다.도착하니 여러군데의 지역에서 먼져와서 기다리고 있네요역사이야기가 생소하니 내가 역사에 대해 많이 모르고 있다는걸 새삼 알게되는 시간ㅋ“지금 이곳은 무열왕릉입니다. 신라 제29대 태종 무열왕의 세속 이름은 김춘추입니다. 김춘추는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시대에 외교를 담당한 사람이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외교부 장관이라고 할 수 있겠죠. 당시 김춘추는 주로 중국에 가서 당나라와 동맹 관계를 추진했습니다. 당시 신라는 내부적으로 왕권이 부산고구려$ 안정된 시기였습니다. 김유신의 군사력과 김춘추의 정치력이 결합을 해서 우선 국정이 안정되었고, 거기서 오는 시너지 효과로 국가의 기운도 상승기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세계 최강이라고 할 수 있는 당나라와 동맹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외교적으로도 안정된 상황이었습니다. 반면 백제는 의자왕이 초반에 국정 운영을 잘했지만 말년에 여러 내분에 휩싸이면서 혼란기를 맞이했고, 고구려도 내분이 일어나서 안정되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국정의 안정화는 신라가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된 또 하나의 배경입니다. 이처럼 국내의 정치력과 함께 외교력이 매우 중요합니다. 김춘추는 그 역할을 잘 해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이 많은 800명의 시민들이 질서 정연하게 걸으며 소박한 대화를 이어나간다 가을의 날씨는 정말 그 무엇과도 비할때 없이 부산고구려$ 화창하다.걸으면서 만난 국화과의 꽃들 너무 이쁘다.“선덕여왕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입니다. 동양의 어느 나라에도 없는, 여자가 왕이 된 역사가 신라시대에 일어난 거예요. 그런데 중국 유일의 여자 황제인 측천무후(則天武后)는 누구를 본보고 왕이 됐을까요? 바로 신라의 선덕여왕을 본보고 자기도 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선덕여왕은 지혜가 많았다고 해요. 그에 대해 세 가지 일화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그중 하나는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선덕여왕이 아직 건강한 상태일 때 본인이 아무 날 아무 시에 죽을 것이니까 준비를 하라고 신하들에게 지시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죽거든 도리천에 묻어달라’ 하고 부탁합니다. 신하들은 도리천이 어디인지 몰라서 어디에 묻어야 하느냐고 물었어요. 그러자 여왕은 ‘낭산 꼭대기에 묻어달라’ 하고 부산고구려$ 대답합니다. 우리가 앉아 있는 이 산의 이름이 낭산이고, 여기가 제일 높은 곳입니다. 여왕이 죽자 신하들은 낭산 꼭대기에서 약간 남쪽을 향해 무덤을 만들었어요. 묻기는 묻었지만 이곳이 왜 도리천인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30년이 지나 나당 전쟁이 일어나면서 이 산 아래에 사천왕사를 세우게 됩니다. 불교의 세계관에서는 수미산의 꼭대기가 도리천이고, 수미산 중턱이 사왕천입니다. 이 산의 아래에 사천왕사를 짓게 되니까 결국 이 산의 꼭대기가 도리천이 된 겁니다. 그러니까 선덕여왕은 지금은 나·당이 연합하지만 자기가 죽고 30년이 지나면 결국은 당나라와 다시 전쟁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예측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선덕여왕은 이런 예지력이 있었다고 삼국유사에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이 외에도 여러 부산고구려$ 가지 일화들을 살펴보면 선덕여왕은 굉장히 지혜롭고 현명한 분이었던 것 같아요.”“김유신 장군은 태생적으로 담이 커서 두려움을 몰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화랑으로도 유명했던 분이에요. 군인이면서도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서 김춘추와 친구인 동시에 혈연적인 관계를 맺어서 김춘추를 도와 신라의 왕권을 안정시키고 삼국통일의 구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을지문덕 장군은 군사적인 파워만 있는 분이었다면 김유신 장군은 정치적 파워도 갖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신라시대에는 결혼제도가 좀 복잡합니다. 김유신의 여동생 둘이 모두 김춘추의 부인이 됐고, 거기에서 난 김춘추의 딸, 즉 공주가 나중에 김유신의 부인이 됩니다.” “아유, 복잡하네요.”(모두 웃음) “뭐가 복잡해요? 남자와 여자가 만난 건데요.(모두 웃음) 하나도 복잡하지 않아요. 김유신이 워낙 공로가 크니까 김춘추가 그를 부산고구려$ 잘 돌보라며 자신의 딸을 보내어 김유신을 받들게 했던 것입니다.” 사천왕사가 있던 터는 지금은 공터이지만 절과 탑을 세웠던 흔적들은 복원되어 있었습니다. 스님을 따라 12명의 유가승이 문두루비법을 행했던 터를 둘러본 후 넓은 대웅전 터에 자리를 잡았습니다.“신라는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당나라와 동맹을 맺었는데, 막상 백제와 고구려가 쓰러지고 나니까 당나라가 그 땅을 차지하려고 했습니다. 신라는 졸지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거예요. 백제도 당나라가 차지하려고 하고, 고구려도 당나라가 차지하려고 하고, 그것에 대해 신라가 반발을 하니까 신라의 왕도 바꾸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신라 안에서도 강하게 저항이 일어나면서 크게 두 가지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강대국인 당나라를 건드려서 좋을 게 없고, 일단 삼국을 통일했으니 부산고구려$ 고개를 숙이고 실리를 추구하자는 목소리가 그중 하나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중종의 선왕인 당태종이 대동강 이남을 신라의 영토로 하겠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에, 당나라가 아무리 강대국이라고 해도 절대로 굴복해서는 안 되고 끝까지 싸우자는 목소리였습니다. 문무대왕은 결국 강경파의 손을 들어주게 되었고, 그 선봉에 선 사람이 김유신 장군이었습니다. 김유신 장군이 이끄는 군대는 우선 한반도에 머물고 있는 당나라 군대를 상대로 선제공격을 했습니다. 그러자 당나라 황제가 본토에서 20만 대군을 모아서 신라 정벌에 나섰습니다. 이번엔 신라가 위기에 몰렸습니다. 그때 명랑(明朗) 법사를 불러서 물으니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당나라 군대를 이길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전력 차이가 워낙 심하게 났으니까요. 그래서 호법선신들의 가피를 입어야 한다고 부산고구려$ 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부족하니 신들의 힘을 빌려서 대항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나라 군대는 바다를 건너와야 했습니다. 바다의 신은 용왕이니까 용왕보다 위에 있는 사천왕과 제석천에게 빌어서 바다의 용이 당나라 군대를 물리치도록 하는 비법을 명랑 법사가 행했습니다. 그 비법을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이라고 해요. 문두루비법에는 제석천의 힘을 빌리는 비법, 사천왕의 힘을 빌리는 비법이 들어 있습니다. 그렇게 문두루비법이라는 주력을 외우자 서해 바다에서 폭풍이 일어나서 20만 대군이 수장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러니 이 사천왕사는 불교를 전하기 위해 지은 게 아니라 나라를 지키기 위해 지은 절입니다. 이런 절을 호국사찰이라고 합니다.”주차봉사도 했던 것이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었던 하루였습니다.준비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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